번역에서든 현지화에서든 한국어로 쉬이 조탁할 수 없는 보편적인 틈새가 있다. 다름아닌 외래어 고유명사다.
물론 고유명사의 발음을 한글로 음차하는 방식에 정해진 법은 없다. 이상하게 적었다고 검찰이 기소하고 그러지 않는다. 다만 국립국어원이 가이드로 정해놓은 외래어 표기규정이 있을 뿐이다. 국립국어원에서 밝히는 외래어 표기의 5대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자모만으로 적는다.
②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
③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
④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⑤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으로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①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ㅸ, ㆆ, ㆁ, ㅿ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혹자들 중 ㅿ를 부활시켜 영어의 zoo나 zebra 등을 표기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한글은 발음기호가 아니라 문자다. 다시 말해 외래어 표기는 어디까지나 음차지, 전사transcription가 아니다. 원어민의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되,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중들이 편하게 소통하도록 돕는다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ㅿ는 세종이 "중국어 日의 자음인 반치음半齒音"이라고 정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 현재는 완전히 사멸해 음가를 알 수 없어진 자모다. 당장 국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치경구개음인지, 유성 치경 파찰음인지, 유성 치경 마찰음인지 의견이 갈리는 판에 다짜고짜 ㅿ의 부활이라니 어불성설이다.
외래어 표기가 전사가 아닌 음차라는 점에 입각하면 ②와 ③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겨울왕국Frozen>의 주제가 <Let It Go>의 프랑스어판 제목인 <Libérée, délivrée>를 옮긴다 치자. 프랑스어의 r은 원칙상 구개수 전동음인 /ʀ/로 발음되지만 Libérée에서는 조음 위치가 앞으로 이동해 가벼운 설측음이 섞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벨헤 델리븧헤"같은 표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r은 하나의 음운이며, 따라서 하나의 기호인 ㄹ, 또는 ㅀ로 표기해야 한다는 얘기다. 덧붙여 ③에서 7언종성 받침표기법을 강제하고 프랑스어 세칙에서 r은 ㄹ로 표기하라 하였으므로, 가이드에 따르면 "리베레 델리브레"로 표기해야 한다.
물론 국립국어원의 입장이 곧 진리는 아니며, 내가 이에 모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④가 그렇다. 이 규정에 따르자면 엄연히 된소리 위주로 구성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의 자음도 모두 거센소리로만 적어야 한다. Shakira의 노래 <Si Te Vas>의 한 소절을 보자.
Si te vas, si te vas, ya no tienes. que venir por mi
시 테 바스, 시 테 바스, 야 노 티에네스, 케 베니르 포르 미
떠난다면, 떠날 거라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
국립국어원이 만들어놓은 표준세칙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인지 한 눈에 보인다. ㄸ, ㄲ, ㅃ 등 엄연히 한국어에도 있는 자모를 죄다 거센소리로 바꿔놓는 바람에 얼핏 보면 무슨 에스페란토 같다. 게다가 국립국어원은 lobster의 표기를 영국식 발음에 가까운 "로브스터"라고 정하는 등 세칙에서 해당 언어가 발원된 지역의 발음을 우선시하고 있다. 롭스터 아닌가 싶지만 넘어가자 때문에 ya를 명백히 "쟈"에 가깝게 발음하는 남미식 발음을 반영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콜롬비아 의문의 1패 이처럼 자모의 사용을 제한하는 이유는 표기의 경제성을 위해서일텐데, "시 떼 바스"라는 표기가 "시 테 바스"에 비해 어느 구석에서 비경제적이라는 건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덧붙여 지금은 빠졌지만 예전에는 "이중모음을 되도록 배제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국립국어원이 ピカチュウ를 "피카츄"가 아닌 "피카추"로 적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온 천하에 망신을 당한 사건도 이 탓이다. 아예 비가주로 적으라는 비난도 거셌다
결국 "원칙은 세우되 유연하게 반영한다"는 뻔한 말로 돌아와야 한다. 한글자모가 가진 장점은 최대한 뽑아내되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해괴한 형태의 표기는 지양하자는 얘기다. 물론 번역할 작품의 내부적, 문화적 맥락도 고려해야 한다. 번역가가 혼자 폭주하면 Hermione가 헤르미온느가 되는 거고, 반대로 공부가 너무 부족하면 <반지의 제왕> 번역했던 이미도처럼 되는 거다. 여기에 대해선 나중에 더 쓸 기회가 있을 거라 믿는다.
덧. 트위터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보았다.
"스코틀랜드식 발음에 익숙하신 분 계신가요? 지명인 Auchnacraig를 한글로 어떻게 적어야 할까요?"
Auchnacraig는 스코틀랜드 중서부지방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구글 지도 상에는 어째서인지 "오케크레이그"로 표기되어 있지만 직관적으로도 틀려 보인다.
과연 뭐라고 읽는 걸까? Auchna-라는 어근을 공유하는 지명은 여럿 있지만, 유튜브와 forvo 등을 이용해 확인해 보면 읽는 법이 저마다 제각기 달라 가닥을 잡기 어렵다. 아크나, 오슈나, 오크나... 심지어 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끼리도 발음이 다르다! <해리 포터>처럼 작가가 발음 가이드라인을 잡아주는 경우라면 편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일단 어근을 분석하는 게 좋겠다.
Auchnacraig는 Auchna + Craig로 분리할 수 있고, 앞의 Auchna는 게일어 어근이다. 명사 원형(게일어는 명사도 변화한다)은 Achadh고, Auchadh라는 표기도 허용된다. Achadh는 땅이라는 뜻이고, 표준 발음은 "아흐그"에 가깝다. ch가 무성 구개수 마찰음 /χ/로 발음된단 얘기다. 첫 음절의 철자가 A지만 Au도 허용된다는 점 때문에 음운영어화(Anglosise)의 영향으로 앞부분을 /a/가 아닌 /ɒ/로 읽는 경우가 생긴 모양이다. /ɒ/로 발음하던 잉글랜드 사람들의 습관이 스코틀랜드로 역수입되는 등의 상호작용이 있었던 흔적이라 하겠다.
요약하면 Auchnacraig는 크레이그의 땅이라는 뜻의 게일어가 약간의 철자변형을 거친 경우다. 국립국어원에서 게일어 표기세칙을 정한 적은 없지만, 독일어 세칙에서 /χ/를 ㅎ로 적는 용례가 있다. 게일어 어근을 존중해 "아흐나크레이그"로 적는 것이 가장 합당해 보인다.
질문을 작성하셨던 분은 "오크나크레이그"라고 적는 쪽을 택하신 모양이다. 이쪽은 잉글랜드식, 적어도 스코틀랜드인이 사용하는 영어 발음에 더 가까운 표기다. 사실 원작자가 분명하게 발음을 제어해주지 않는 이상 정답이란 없다. 매번 새로 고민하고 또 공부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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