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지훈보이콧 해쉬태그가 온 SNS를 뜨겁게 달궜다.
사건인즉슨 2016 하반기 최대 기대작 중 하나인 <수어사이드 스쿼드> 공식 예고편의 자막에서 할리퀸의 대사가 엉망진창으로 번역된 사실이 알려졌고, 여기에 최근 촉발된 여성혐오에 대한 여론이 맞물려 번역가 박지훈에게 포화가 쏟아진 것이다.
박지훈이 처음 번역가로 스크린에 데뷔한 시점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건 2005년 개봉된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였다. 박지훈은 "쪼다!", "당장 그 년 주민번호 불러", "됐거든?", "좋댄다" 등 가볍고 통통 튀는 번역을 거침없이 선보였고, 애당초 영화 자체가 '부부싸움'에 대한 블록버스터급 메타포였던 터라 이게 제대로 먹혔다. '센스있는' 번역가의 당당한 등장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몇 되지 않는 소수의 번역가가 장악하고 있는 스크린 번역계의 특성상 박지훈에게는 곧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고, 슬슬 그의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밑천이라 함은 부족한 영어실력은 물론이요, 그의 핵구린 세계관까지 포함한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007 스카이폴>이다.
She is pretty if you like that sort of thing.
예쁘네요. 된장녀 같지만.
"그런 취향이라면 말리진 않을게요.", "본인 눈에 예쁘시다면야", "취향 독특하시네" 등 수없이 많은 번역의 가능태를 버려둔 채 그는 굳이 '된장녀'를 택했다. 용인발음(RP)으로 정확한 딕션을 하는 MI6 요원 이브가 사용할 거라곤 상상도 하기 힘든 여성혐오적 단어다. 번역가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순간.
이번에 논란이 된 자막 역시 여성혐오(Misogyny)적 사상이 개입한 결과 만들어진 참극이다. 할리퀸이 어떤 캐릭터인지 공부하지 않고 그가 여성이라는 점에만 주목한 탓에, 경찰을 서슴없이 돼지새끼들이라 칭하고 배신자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처형하는 할리퀸의 대사를 얌전한 존댓말로 번역해버린 것이다. 위에 첨부한 장면의 자막은 전부 수정되어야 한다.
What?
왜요? → 뭘 봐?
(You irritate or vex me...)
I'm known to be quite vexing, I'm just warning you.
내가 좀 그런 스타일인데 봐주면 안돼요?
→ 내 얘긴 것 같은데 미리 경고 좀 할게
I love this guy.
이 오빠 맘에 들어 → 나 얘 맘에 들어
How about you, hot stuff?
뜨거운 오빤 뭐? → 거기 불 뿜는 애는 뭘로 줄까?
배급사 측은 황급히 "예고편 번역 담당은 박지훈이 아니었다"며 자막을 수정했지만, 그간 그가 저질러 온 행적이 있는 터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만화계에 오경화수월이 있다면 영화계에는 박지훈이 있다는 말까지 도는 마당에 관객들의 지속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박지훈에게 일감이 공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그콘서트 유행어를 사용해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배급사도, 충분한 조사 없이 주먹구구로 번역을 시도하는 번역가 개인도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