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과/영화2016. 7. 29. 20:25



 얼마 전 #박지훈보이콧 해쉬태그가 온 SNS를 뜨겁게 달궜다.


 사건인즉슨 2016 하반기 최대 기대작 중 하나인 <수어사이드 스쿼드> 공식 예고편의 자막에서 할리퀸의 대사가 엉망진창으로 번역된 사실이 알려졌고, 여기에 최근 촉발된 여성혐오에 대한 여론이 맞물려 번역가 박지훈에게 포화가 쏟아진 것이다.


 박지훈이 처음 번역가로 스크린에 데뷔한 시점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건 2005년 개봉된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였다. 박지훈은 "쪼다!", "당장 그 년 주민번호 불러", "됐거든?", "좋댄다" 등 가볍고 통통 튀는 번역을 거침없이 선보였고, 애당초 영화 자체가 '부부싸움'에 대한 블록버스터급 메타포였던 터라 이게 제대로 먹혔다. '센스있는' 번역가의 당당한 등장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몇 되지 않는 소수의 번역가가 장악하고 있는 스크린 번역계의 특성상 박지훈에게는 곧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고, 슬슬 그의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밑천이라 함은 부족한 영어실력은 물론이요, 그의 핵구린 세계관까지 포함한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007 스카이폴>이다.


She is pretty if you like that sort of thing.

예쁘네요. 된장녀 같지만.


 "그런 취향이라면 말리진 않을게요.", "본인 눈에 예쁘시다면야", "취향 독특하시네" 등 수없이 많은 번역의 가능태를 버려둔 채 그는 굳이 '된장녀'를 택했다. 용인발음(RP)으로 정확한 딕션을 하는 MI6 요원 이브가 사용할 거라곤 상상도 하기 힘든 여성혐오적 단어다. 번역가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순간.


 이번에 논란이 된 자막 역시 여성혐오(Misogyny)적 사상이 개입한 결과 만들어진 참극이다. 할리퀸이 어떤 캐릭터인지 공부하지 않고 그가 여성이라는 점에만 주목한 탓에, 경찰을 서슴없이 돼지새끼들이라 칭하고 배신자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처형하는 할리퀸의 대사를 얌전한 존댓말로 번역해버린 것이다. 위에 첨부한 장면의 자막은 전부 수정되어야 한다.


What?

왜요? → 뭘 봐?


(You irritate or vex me...)

I'm known to be quite vexing, I'm just warning you.

내가 좀 그런 스타일인데 봐주면 안돼요?

→ 내 얘긴 것 같은데 미리 경고 좀 할게


I love this guy.

이 오빠 맘에 들어 → 나 얘 맘에 들어


How about you, hot stuff?

뜨거운 오빤 뭐? → 거기 불 뿜는 애는 뭘로 줄까?


 배급사 측은 황급히 "예고편 번역 담당은 박지훈이 아니었다"며 자막을 수정했지만, 그간 그가 저질러 온 행적이 있는 터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만화계에 오경화수월이 있다면 영화계에는 박지훈이 있다는 말까지 도는 마당에 관객들의 지속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박지훈에게 일감이 공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그콘서트 유행어를 사용해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배급사도, 충분한 조사 없이 주먹구구로 번역을 시도하는 번역가 개인도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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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과/블리자드2016. 7. 29. 04:07

 최근 공개된 오버워치의 새 영웅 '아나'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만화 <노병들>.


 일본이나 한국에서 발매되는 만화와는 전혀 다른 북미형 만화 특유의 리듬과 대사량 때문에 평소 습관을 버리고 한 줄씩 천천히 읽다가(나는 이것을 잉크젯 프린터형 독해라고 부른다) 문맥상 다소 의문스러운 구절이 있어 원판인 <Old Soldiers>를 찾아 비교해 보았다.


 우려한대로 오역이었다.




 They left you to die, they left me to suffer...

놈들이 날 죽게 놔뒀어. 고통받게 놔뒀어...

→ 널 죽게 버려둔 놈들이... 내겐... 이런 고통을...


 물론 떡밥 부족(...) 탓에 They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과거 오버워치에 소속되어 있던 인물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수도, 그 뒤에서 오버워치의 해체를 조종한 미지의 세력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두 문장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고 주어가 일치하며, 목적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me는 발화자인 가브리엘(리퍼), you는 당연히 아나를 가리킨다. 헌데 번역판의 문장에 따르면 빈사상태로 버려진 것도, 고통을 겪은 것도 리퍼가 된다. 명백한 오역이다.


 덧붙여 다른 문장들도 조금 다듬고 싶다.



What happened to you...?

당신 왜 이렇게 된 거야...? → 너, 그 꼴은 대체...?


HE did this to me, Ana.

저놈이 이렇게 만들었지. →  잭... 잭이야...


THEY left me to become this thing.

그놈들이 내가 이 꼴이 되게 버려뒀어. → 전부 다... 놈들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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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게임2016. 7. 28. 22:47

[경고]

파이널 판타지 14의 탐타라 묘소(어려움 난이도)에 대한 중대한 스포일러 있음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서술 트릭이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속았다.


 사스타샤 침식동굴 앞에서 비난받던 에다가 문득 차가운 무표정을 지었을 때,

 리아빈과 파이요레이요가 에다에게 "소중하게 갖고 다니는 머리, 빨리 묻어버려!" 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

 울다하에서 다시 만난 에다가 "내 약혼자가 그랬듯 당신을 동경한다"고 말했을 때.


 이 끔찍한 이야기의 결말을 예측할 단서는 이미 모두 주어져 있었다.

 (원래 이 던전의 이름은 (어려움)이 아니라 惨劇霊殿, 즉 참극이 일어난 영혼의 전당이다)


 에다가 미쳐가는 과정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건 던전 내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일기장이다.

 


 두 번째 일기장 정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죽은 애인을 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일곱 번째 일기장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미쳐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히라가나로만 적어내려간 점이 특히 소름끼친다.


 문제는 이 지점, 즉 '한자 대신 히라가나만 사용했다'는 내용 외적 사실을 어떻게 옮겨낼 것이냐다.


 액토즈소프트는 과연 어떤 방법을 택했을까.





 바로 '띄어쓰기'.


 일본에서 처음 말과 글을 배운 아이들이 성장해 가면서 주요 단어들을 가나 대신 한자로 표기하게 하는 것이 초등교육의 중요 포인트에 해당하듯, 우리나라 역시 아이들이 처음 한글을 뗐을 때는 넘어가던 띄어쓰기를 성장에 따라 차츰 요구하기 시작한다. 일본인이 한자를 어려워하듯 우리 역시 대강이 아닌 정확한 띄어쓰기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이따금 타인이나 컴퓨터의 도움을 구하기도 한다.


 에다가 정신적 퇴행을 겪으며 주요 단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대신 점차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을 그대로 히라가나로 적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띄어쓰기 없이 모든 문자를 붙여서 표기한 번역은 거의 정답에 가깝다.


 F.A.T.E는 '돌발 임무'로, 그랜드 컴퍼니는 '총사령부'로, 프리 컴퍼니는 '자유부대'로, 지명인 팔콘즈 네스트도 '매의 보금자리'로 옮길만큼 액토즈는 적극적으로 한국어 현지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결과는? WoW가 그랬듯 처음에는 어색하다는 반발을 샀지만 2016년 현재는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액토즈소프트의 선택과 그 결과에 블리자드가 최초로 제시한 현지화 전략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기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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