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 씨가 쓴 <번역은 반역인가>를 읽었다. 번역 일반론에 대한 가벼운 물음을 제시하는 책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한국 번역계의 오점을 고발하는 보고서에 가까워서 뒷맛이 씁쓸했다.
"번역은 반역이다"
말과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경구를 모를 리 없다. 원래는 이탈리아의 오랜 경구였던 "Traduttore, tradittore"를 옮긴 것으로, 사전적 직역을 하자면 "번역자는 반역자"라는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Translation is transgression"으로 알려진 모양. 라틴어를 종교적으로 숭상하던 르네상스 시대 지식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원문의 아름다움과 심오함을 그대로 전할 수가 없다'는 좌절을 담아 만든 경구치곤 웃기게도 영어와 한국어 번역이 모두 꽤 잘된 사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이상섭 씨가 쓴 번역 일반론에 따르면 "한국어로의 번역은 여러가지 역사적 사정으로 인하여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반역이 되기 쉽"다. 문호 개방 후 최초로 영어 서적을 번역한 사람들은 모두 영어가 아니라 일본어와 한문에 능한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대한민국 번역의 기술적 축적은 영→일→한의 중역을 토대로 행해진 셈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너는 그에게 코오피를 대접당하였느냐?"나 "그 소년은 그의 어머니에 의하여 음식을 먹이워졌다"같은 기괴한 문장이 영문법 서적에 실렸고, 이게 가방끈 좀 길다 싶은 사람들의 보통 글에까지 전염되고 말았다. (지금 내가 쓴 이 문단에도 온갖 일본식 직역주의의 산물들이 녹아있을 터다)
영한번역의 보편적 품질에 대한 불신이 쌓인 와중에 영어 사교육 열풍까지 가세해, 영미권에서 발매되어 우리나라로 수입된 게임은 그냥 영어로 하는 게 당연하다는 풍토가 생겼다. 20년 전에는 정말 그랬다. 일본에서 발매된 게임에 영어 플레이 모드가 있으면 감사합니다 넙죽 절이라도 해야 했다. Fireball은 파이어볼이었고, Immune은 이뮨이었으며, Nuclear launch detected는 그냥 뉴클리어 런치 디텍티드(...)였다. 물론 간간히 한국어 번역을 시도하는 사례야 있었다. 그러나 수입/배급사에서 정식으로 한글화를 진행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한스타나 스토리크래프트처럼 아마추어 팀이 패치 형태로 제작하는 경우였다.

북미에서 영어 기반으로 발매된 게임이 배급사에 의해 한글화패치의 은사를 입은 최초의 사례라면 <녹스>나 <발더스 게이트> 정도일까. 재미있는 건 번역품질이 비교적 높았던 <녹스>는 처참하게 망했지만 오역 투성이였던 <발더스 게이트>는 국내에서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는 것... 세상사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다.
아무튼 기조철학이고 기술 축적이고 아무 것도 없이 주먹구구로 나아가던 한국의 게임 현지화 시장에 신선하고 거대한 충격을 던져준 게임이 있었으니... 모르면 간첩 소리 들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다.

등장인물과 NPC의 이름이나 성을 비롯해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작정하고 영어의 흔적을 없애버린 한글화 철학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Fireball은 더이상 파이어볼이 아닌 화염구였고, Immune은 면역이 되었다. 단순히 한글로 옮겨적힌 영어가 아니라, 진짜 '한국어'로 북미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낯선 쾌감. 그건 블리자드가 한글화나 번역이라는 좁은 개념을 뛰어넘어 적극적인 '현지화'를 시도한 덕분이었다.
사전을 매개체로 대응되는 두 언어를 기계적으로 옮겨적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단어를 분해 및 조립하거나 아예 만들어내는 것. '의역'을 넘어서 '오역'이라고 불릴 위험을 감수하고 저지른 이 미친 짓은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이와 같은 현지화 전략은 이후 한국 게임업계의 기본적인 번역철학으로 자리잡았다. 라이엇의 LoL과 같은 타사의 영어 기반 게임은 물론, 심지어 파이널판타지 XIV같은 일본어 기반 게임에서도 블리자드형 현지화 전략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다룰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블리자드형 언어 현지화의 대표적 사례를 범주화해 정리했다.
1. 신조어 : Mortal
요정이나 신 등 죽지 않는 자(Immortal)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써의 Mortal은 이미 반지의 제왕 시절부터 등장하던 단어다. 영어가 모어인 사람들에게야 운율도 맞고 단어 자체로 개념을 이해하기도 쉬웠겠지만 문제는 한국어로 Mortal을 어떻게 옮기느냐다. 1991년 예문社를 통해 번역된 해적판에서는 "죽을 운명의 인간"으로 옮겨졌지만 길고 조잡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반지의 제왕과 마찬가지로 워크래프트 세계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단어를 블리자드는 "필멸자"로 옮겼다. 없는 단어다. 사전에도 '필멸' 정도가 간신히 적혀있다. Immortal과 Mortal이 주는 간결하고 쌈박한 운율, 그리고 그에 비해 너무나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정반대인 뜻을 표현하기 위해 "불멸자↔필멸자"라는 공식을 만들어 제시한 것이다. 이 기막힌 도전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사람들이 무릎을 탁 치고 다들 환호해야만 성공인 게 아니다. 모두가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후 Mortal을 필멸자로 옮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안전한 선택지가 되었고, 현재는 게임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브컬처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2.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의 이미지에 집중 : Marauder
'불곰'으로 알려져 있는 스타크래프트2 테란 유닛의 원래 이름은 Marauder다. (스타크래프트2가 출시될 시점에서는 이제 원어보다 번역어를 더 친숙하게 여기는 유저들이 많아졌다는 점 역시 주목할만하다) Marauder는 사전적으로 약탈자, 습격자라는 뜻이다. 약탈이나 습격이라면 영어에도 plunder, attack, despoil 등 여러 유의어가 있지만 그 중 maraud는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습격해서 약탈한다는 용례로 주로 쓰인다. 자연히 육식동물의 이미지가 우선 떠오른다. 그 와중에 두툼한 목과 큰 덩치를 지닌 Marauder 유닛의 외관이 눈에 들어온다. Marauder는 그렇게 불곰이 되었다.

3. 단어 다듬기 : Sun eater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첫 번째 확장팩 <불타는 성전> 당시 등장한 던전 중 하나인 메카나르에서는 마지막 네임드 몬스터로 철두철미한 파탈리온이라는 하이엘프를 만날 수 있다. 파탈리온은 낮은 확률로 Sun eater라는 한손도검을 드랍하는데, 나름대로 멋진 외관이라 룩변용으로 인기가 좋다.

이 무기의 이름은 현지화 과정에서 '태양의 포식자'로 옮겨졌다. 타사의 게임인 던전 앤 파이터에 등장하는 비슷한 이름의 무기가 '해를 먹는 자'인 것에 비해 훨씬 권위있고 무기의 이름으로 타당해 보인다. 단순히 한자어와 우리말이 주는 어감 차이에 기댄 것이 아니다. 아서스의 무기 Frostmourne을 서리한으로 옮긴 사례는 너무 유명해서 설명하기 민망할 정도다. WoW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아이템 이름이나 칭호는 이와 같은 조탁 과정을 거쳐 근사한 형태로 완성됐다. 참고로 이 무기를 드랍하는 철두철미한 파탈리온의 영어 이름은? Pathaleon the calculator다.
4. 유행어와 유머코드를 도입한 적극적 초월번역 : 대부분의 업적 이름
초월번역이라는 말이 아직 공식적으로 정의된 단어가 아니라 조금 망설였지만, 어쨌든 대부분 '원문이 표현하는 정서와 내용만을 보존한 채 창작에 가까운 형태로 번역된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1) 원문에서 사용된 단어나 통사구조를 깡그리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구가 가리키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없으며 2) 재치와 유머의 정서를 잘 보존했고 3) 심지어 원문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게 만드는. 블리자드 게임의 업적 이름은 드물게도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곧 출시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여섯 번째 확장팩 <군단>의 업적명만 해도 이미 유저들과 네티즌에게 대단한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일부를 아래에 소개한다.
[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기술이 미래다]
[비쥬얼 와우팡]
[군단요리를 부탁해]
[아아 수라마르에 지맥이 가득해]
[흙 만지게 해주세요!]
[나... 나도 흙 만질 거야!]
[본체 말고 뭣이 중한디?]
[나 꿍꼬또 벌레꿍꼬또]
[눈깽이 야렸나요]
[중첩, 폭룡이 최고다]
[쮸쀼쮸쀼]
[눈 가리고 와우]
[유물 무기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넘나 전망 좋은 곳]
[수수께끼는 풀렸다]
[꿀 같은 걸 끼얹나?]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진리 알 까네]
[용 족 출 현]